[박완규의 책읽기 세상읽기] (34)‘자전거 여행’ - 세상의 길들

‘자전거 여행’은 작가 김훈이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다니면서 산천과 교감한 기억을 담은 산문집이다. 자전거는 사람이 두 다리의 힘으로 바퀴를 돌려서 움직이는 ‘탈것’이다. 이 책 프롤로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 속으로 흘러 들어온다. … 흘러오고 흘러가는 길 위에서 몸은 한없이 열리고, 열린 몸이 다시 몸을 이끌고 나아간다. …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몸은 세상의 길 위로 흘러나간다.” 그가 자전거를 애지중지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봄에 관한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눈길을 끈다. “꽃피어 봄 마음 이리 설레니/ 아, 이 젊음을 어찌할거나.” 7세기 신라의 젊은 여승 설요는 이 시 한 줄을 써놓고 절을 떠나 속세로 내려왔다고 한다. 봄이, 젊음이 그런 것이니 탓할 일만은 아닌 듯하다. 노인은 봄이 오면 앓는다. “봄은 숨어 있던 운명의 모습들을 가차없이 드러내 보이고, 거기에 마음이 부대끼는 사람들은 봄빛 속에서 몸이 파리하게 마른다.“ 이를 춘수(春瘦)라고 한다.

봄의 흙은 헐겁다고 작가는 말한다. “남해안 산비탈 경작지의 붉은 흙은 봄볕 속에서 부풀어 있고, 봄볕 스미는 밭들의 이 붉은색은 남도의 봄이 펼쳐내는 모든 색깔 중에서 가장 깊다. 이 붉고 또 깊은 밭이 남도의 가장 대표적인 봄 풍광을 이룬다.” 남도의 붉은 흙을 본 사람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것이다.

냉이국 한 모금으로도 봄의 맛과 냄새를 느낀다. “겨울 동안의 추위와 노동과 폭음으로 꼬였던 창자가 기지개를 켰다. 몸 속으로 봄의 흙냄새가 자욱이 퍼지고 혈관을 따라가면서 마음의 응달에도 봄풀이 돋는 것 같았다.” 봄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손쉬운 방법이다.

서해에서는 갯벌을 응시한다. 서해의 현재 해안선은 8000년 전에 형성됐다고 한다. “이처럼 짧은 기간에 그토록 넓은 갯벌을 일구어 낸 것은 내륙 깊숙이 달려드는 이 젊은 바다의 힘이다. 서해는 깊이 밀고 멀리 당긴다. 갯벌은 육지와 바다의 완충이며 진행형의 대지다. 갯벌은 오목하고 부드럽다. 바다 쪽으로 나아갈수록 갯벌의 입자는 굵어진다.” 숲은 갯벌과 대비된다. “숲의 시간은 헐겁고 느슨하다. 숲의 시간은 퇴적의 앙금을 남기지 않는다. 숲의 시간은 흐르고 쌓여서 역사를 이루지 않는다. 숲의 시간은 흘러가고 또 흘러오는 소멸과 신생의 순환으로서 새롭고 싱싱하다. 숲의 시간은 언제나 갓 태어난 풋것의 시간이다.”

인간 세계로 넘어간다. 안동 하회마을의 길은 자연의 길과 다르다. “하회의 집들은 서로 어슷어슷하게 좌향을 양보하면서, 모두 자연 경관을 향하여 집의 전면을 활짝 개방하고 있다. 길은 그 집들 사이를 굽이굽이 흘러가 각 집의 대문에 닿는다. 담장은 차단이고, 길은 연결이다. 길은 낮은 흙담을 따라 굽이친다. 차단과 연결이 함께 길을 따라 흐른다. 길은 대문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이 집 저 집의 모퉁이를 돌아서 대문에 당도한다. 인간의 삶은 감추어져야 하고 또 드러나야 한다.” 그래서 “길은 연결과 드러남의 구도이고, 집은 차단과 감춤의 구도”라고 했다.

경주시 감포읍에서는 역사를 돌아본다. “인간은 아늑하고 풍성한 곳에서 다툼 없이 살고 싶다. 낯설고 적대적인 세계를 인간의 안쪽으로 귀순시켜서, 그렇게 편입된 세계를 가지런히 유지하려는 인간의 꿈은 수천 년 살육 속에서 오히려 처연하다. 세계를 개조하려는 열망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무기의 꿈과 악기의 꿈은 다르지 않다. … 아마도 역사 속에서, 진흥왕의 무기와 우륵의 악기는 비긴 것 같다.” 이어 고려 후기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대해 “인간의 욕망과 슬픔과 기쁨과 환상과 열망에 역사라는 지위를 부여한다”고 평가했다. “‘삼국유사’는 현실의 역사이며 마음의 역사인 것이다. 만파식적에 대한 기록이 없었더라면, 7세기의 역사는 살육과 모반으로 지고 샌 불구의 역사에 불과했을 터이다. 삼국 통일이 어찌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김훈은 자전거를 타고 산하를 누비면서 이처럼 많은 것을 보고 느낀다. 그러니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 나아가는 일은 복되다”고 했을 것이다. 자전거는 연필과 함께 그를 상징하는 물건이다. 얼마 전 산문집 ‘연필로 쓰기’를 펴냈다. 시인 장석주는 “연필로 글을 쓰고 자전거로 이동하는 것은 시대에 뒤처진 행위가 아니라 제 몸을 건사하고 쓸 줄 아는 사람만의 일”이라고 했다. 글 쓰는 일은 그만두더라도 자전거를 타기에는 좋은 계절이다.

박완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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