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미칼럼] ‘헌법 지킴이’ 조순형을 떠올리며
조순형 전 의원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주도했다가 17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2006년 7월 재보선에 출마했을 때다. 출마의 변으로 “헌법에 배치되는 법안들이 너무 많다. 헌법 기본 이념, 가치를 지키는 데 미력이나마 기여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입법권 남용 사례로 노무현정부에서 추진했던 소위 4대 개혁 입법(국가보안법·신문법·과거사법·사학법)을 조목조목 설명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그는 재보선으로 국회에 재입성하자마자 대통령이 지명한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자격 요건의 하자를 지적해 결국 지명 철회를 끌어냈다. 2012년 정계를 떠나기까지 7선을 하는 동안 국회 법사위 터줏대감으로 법과 원칙을 따졌다. ‘미스터 쓴소리’라는 별명에 걸맞았다.
10년도 지난 그와의 인터뷰를 떠올리며 취재 수첩을 찾아본 건 국회 패스트트랙과 조국 정국을 거치면서 법치의 실종을 목도한 탓이다. 패스트트랙에 얹혀 선거법과 공수처법, 검경 수사권 조정 관련 법안이 여당 주도로 국회를 통과하는 동안 법적 시시비비는 없었다. 제1야당을 제외한 ‘4+1’ 협의체 짬짜미로 처리된 선거법 개정안은 중앙선관위로부터 14건에 달하는 보완 입법 요청을 받았다. ‘헌법 불합치’ ‘위헌’ 판정으로 효력이 상실된 조항들이 법안에 그대로 담겼다. 검경 수사권 조정 법안 통과로 ‘공룡 경찰’에 대한 우려가 쏟아지자 뒤늦게 여당은 경찰 개혁 입법을 서두르겠다고 한다. 공수처 신설의 부작용을 지적하며 유일하게 기권표를 던진 금태섭 민주당 의원은 ‘빨간 옷을 입은 배신자’로 찍혔다.
삼권분립 정신을 “정치하는 이유”라던 조순형 같은 사람에게는 코미디 같은 일들이다. 패스트트랙 법안을 마무리지은 뒤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는 청와대 만찬에서 “맛있는 저녁을 줬으니까 밥값을 하겠다”고 했다. 대의민주주의에서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이 밥값하는 건 국민 뜻을 반영해 법을 만들고 정부 정책·예산을 감시·견제하는 일이다. “국민은 몰라도 되는” 선거법, 검찰 잡겠다고 무소불위의 공수처와 ‘공룡 경찰’을 만들어놓고 할 말은 아니다.
대의기관이 제 역할을 못할 때 벌어지는 일들을 우리는 매일 겪는다. 견제 세력이 없는 청와대, 정부는 자신들을 향해 칼을 들이댄 검찰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살아 있는 권력을 수사한 검찰 간부들이 좌천된 데 이어 실무 수사 검사들도 조만간 뿔뿔이 흩어질 위기다.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 회견에서 검찰이 기소한 조국 전 법무장관에 “아주 크게 마음에 빚을 졌다”고 했을 때 예견된 일이긴 하다. 친문 세력만 “조국은 무혐의”를 주장하는 줄 알았는데 추미애 법무장관이 임명한 대검 반부패강력부장이 같은 주장을 했다니 “1·8 인사는 권력형 비리 수사를 방해하려는 의도”라는 변호사 130명의 성명이 설득력을 얻는다.
법치 상징인 검찰에 몰아치는 광풍을 보면 사법부라고 온전할까. 이미 ‘양승태 대법원’ 비판에 앞장섰던 판사들이 민주당 간판 아래로 속속 모이고 있다. 사법 독립을 외쳤던 이들이다. 2017년 대선 당시 댓글 여론을 조작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김경수 경남도지사에 대한 항소심 선고는 어제 예정됐다가 또다시 연기됐다. 1심에서 김 지사가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을 당시 민주당은 “최악의 판결”이라며 판사 탄핵을 운운했다. 여당이 대놓고 여론 재판을 부추기는 판에 2심 재판부 고심이 클 법하다. 어떤 판결이 나오든 후폭풍은 불가피하다. 1심 취지가 유지되면 여당과 친문 세력이 사법부를 가만두지 않을 테고, 반대 결론이 나면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 중립성 논란은 증폭될 것이다.
“과거 함께 고생한 사람이니 봐달라.” 유재수 감찰 무마 혐의로 기소된 조국 공소장에 등장한 이 대목은 법치를 대하는 정권 태도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법의 지배가 뿌리내리지 못하면 중우정치(衆愚政治)로 흐를 수 있다고 우려했는데, 법치가 무너진 국가에선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린다. 여당 인사들은 ‘국민의 명령’ ‘촛불 혁명’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지금도 네 편 내 편으로 나뉘어 광장에서, 인터넷과 SNS에서 진지전이 한창이다. ‘내로남불’ 법치의 대가를 국민이 치르고 있다.
황정미 편집인